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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세종대왕자태실 [星州世宗大王子胎室] -훗날 올바른 역사의 평가를 바라며...-

by 김PDc 2009. 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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星州世宗大王子胎室

국가지정 사적 제444호
소재지 :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산8


이 태실은 선석산 아래 위치한 이 곳 태봉[胎峯, 해발 2558.2m]의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세종대왕의 장자 문종을 제외한 모든 왕자의 태실과 단종이 원손으로 있을 때 조성한 태실등 모두 19기가 군집하고 있다.






 태실은 세종 20년(1438)에서 24년(1442) 사이에 걸쳐 조성되었으며, 석물은 화강암을 사용하였다. 전체 19기중 14기는 조성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나 수양대군[세조]의 즉위에 반대한 다섯 왕자의 태실의 경우 사각형의 기단석을 제외한 석물이 파괴되어 남아 있지 않다. 수양대군[세조]의 태실 앞쪽에는 왕위에 즉위한 이후 임금의 태실인 태봉으로 봉하고 세운 가봉비를 세워두었다.








태실석물은 지상에는 맨 밑에 사각형의 기단석을 두고, 그 위에 납작한 편구형의 중동석을, 맨 위에 보주형의 상륜을 가진 개첨석을 올린 구조로되어 있으며, 대석의 아래 지하에는 편평한 판석형의 개석 아래로 사각형의 석함을 둔 형태로 되어 있다. 각 태실의 앞에 세워둔 태실비에는 전면에 'ㅇㅇ(大)군명태장(우측)황명정동ㅇ년ㅇ월ㅇ일입석(좌측)'의 명문을 세로2줄로 각자하여 태실의 주인공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하였다. 1977년 정비사업의 과정에서 도자기류 4점과 지석 3점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국립대구박물관, 국립경주박물관, 국립경주박물관 및 경북대학교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세종대왕자태실은 우리나라에서 왕자태실이 군집을 이룬 유일한 곳으로서 조선시대 태실의 초기 형태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교체와 함께 나타난 왕실의 태실 조성방식의 변화 양상을 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역사는 먼 훗날에 평가된다.
그것은 진실이든 거짓이든 민초의 가슴에 남게된다.
성공하면 혁명이되고 실패하면 반란이 된다.
고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를 뒤로하고 찾은 성주세종대왕자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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