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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영상.방송]2262

이별 이별 낚시가 금지된 이후론 갈 일이 없었다 눈 내리던 추동리 버스 정류장 마산집 누룩 둥둥 떠 있던 동동주며 앞산 숱한 까투리들 건너 마을 우물 속에 살던 붕어 두어 마리 모두의 안부가 궁금했지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김치전을 돌담 너머로 건네주시던 옆집 벙어리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대기업 입사 시험에 떨어진 후론 웬지 그 곳이 싫어졌다 이제 찾아간다 수자원 공사에서 퇴거명령서가 왔을 거라는 형님의 심부름으로 기억을 더듬어 잡풀처럼 무성하다가 시들어진지 삼십 년 과연 집은 그대로인가 쥐약 먹고 죽은 개를 파묻었던 뒤안 감나무는 얼마나 자랐을까 이별을 마주 하러 간다 - 이영길 - 2019. 5. 10.
카꽃 카꽃 친구가 카톡으로 카네이션을 보내 왔다 가슴에 꽃을 달아 드릴 부모도 없고 종이꽃이라도 달아 줄 새끼들도 없는 데 이 무슨 민망하고 어색한 카꽃인가 실가로 몆 만원은 족히 될 것 같은 꽃바구니가 부담 되어 얼른 돌려 보냈다 참 불편한 처사다 그 깟 꽃 한송이가 뭐라고 이토록 잃어 버린 가슴이 그리워 지는가 치꽃의 무게를 알지 못하는 마음이 슬픈가 한줌 흙이 되고 재가 되는 세월 구봉산 영락원 납골함에 붙은 사진에는 꽃을 단 자와 달지 않은 자들이 말을 닫고 카톡도 닿지 않는 저승에 매달린 카네이션만 혼자 붉었다 - 김주탁 - 2019. 5. 10.
두 번째 혹은 맨 아래 자리 두 번째 혹은 맨 아래 자리 해가 길어지면서 연말의 일들도 기억에서 멀어졌다 오랜만에 직장후배 L과 밥 약속을 하고 “누구랑 밥 먹을지 모르는 게 퇴직이다”라는 말을 불쑥 건네고 말았다 셔츠를 입을 일이 없어진 나는 단춧구멍을 잘못 꿰었다 봄날 꽃 피는 순서도 아닌데 신경 쓸 일 없다면서 단추를 받아준 자리를 만져봤다 목에서 배꼽 방향으로 세 번째 자리, 잘못 없이도 일상에서는 죄송한 두 번째 자리, 어긋나지 않도록 길들여진 자리, 넥타이를 잠시 넣었다가 민망하게 열려있는 자리 순댓국과 소주로 실없는 저녁을 먹었다 집으로 돌아와 셔츠를 벗으면서 내 자리가 궁금했다 맘 놓고 풀지 못하는 배꼽에서 목 방향으로 여섯 번째 자리? 눈치 없는 누구든지 매달릴 수 있는 어중간한 자리? 계속 끼우다보면 잘못 끼운 것.. 2019. 5. 9.
낚시의 기억 낚시의 기억 아버지는 늘그막에 농사일을 배웠다 아픈 어깨를 두고 농사 탓을 했지만 농사를 모르는 내 어깨가 아픈 것을 보면 아버지의 진단은 틀렸었다 석양의 목덜미가 물속으로 빠질 무렵이면 나는 낚시를 던졌다 반원을 그리던 별이 찌를 건드리면 잔물결이 일었다 먼 조상이 물고기 모양이었다고 했다 내 몸에는 비늘에서 미늘로 생존방식을 바꾼 이유가 남았을 것이다 다음 조상은 물고기 낚는 기술을 전했을 것이다 검은 산 그림자가 흔들리다 말없이 물 아래로 내려가곤 했다 밤새 낚시를 들어올렸다 미끼를 따먹고 달아나는 붕어가 쓰다가 밀쳐 둔 글줄을 닮았다 물에 뜬 별이 지워질 때까지 나는 낚시의 기억을 살려내지 못했다 내일은 근로계약서에 서명하는 날이다 어깨 통증을 느끼며 낚싯대를 접고 물비린내 나는 손을 씻었다 풀죽.. 2019. 5. 9.
구절초가 구절초에게 구절초가 구절초에게 배와 내가 땅 속 뿌리로 이어진 지 오래니만큼 염치없지만 부탁을 좀 해야겠네 철없는 이월 햇살이 여물다고해도 얼마나 여물 수 있겠나 그 햇살에 더러 언 땅이 녹더라도 내 몸을 천천히 좀 밀어주게 겨우내 움츠렸다 줄기까지 마른지 오래지만 꽃을 피워내던 감각이 생생하게 살아남아 밀리는 그 끝이 아프고 아프다네 꽃 보던 시절 우악스런 낫질에 목이 잘리고 한 다발씩 묶여서 빈 처마에 매달렸다가 약탕기에서 끓어 넘치는 게 나을 뻔했다고 속에도 없는 혼잣소릴 되뇌게 해서야 쓰겠나 성하던 목숨도 시들고 비틀리다 보면 혼자 서 있기도 여간 힘든 게 아니라네 봄 눈 녹으면 스스로 몸 끊고 누울 것이니 후배님 몸도 생각하면서 천천히 밀어주게 엄살이 아니라네 그대도 한 번의 봄을 남겨두고 있지 않은가 -.. 2019. 5. 9.
풍경 풍경 회의는 오후 세시에 열린다고 했다 유리창을 뛰어 넘은 햇살이 회의실 바닥으로 떨어지며 소집을 알렸다 모이는 사람들은 순서가 있어 생각이 많은 이가 생각이 없는 이보다 먼저 왔다 회의가 생기는 회의일수록 눈치껏 끄덕이거나 혹은 눈치를 채지 못하게 끄덕끄덕 거렸다 알 만한 상황이고, 알 만한 사람만 참석했는데 예상과는 다른 일이 벌어졌다 회의가 좌우로 튀다가 진보의 햇빛과 보수의 눈빛이 햇빛과 눈빛을 서로 바꾼 것이다 별일 없었다고 수습은 했지만 눈곱만큼도 관련 없는 햇살이 멱살을 잡혔다 늦게 와서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이들 때문이라고 회의실 구석 있던 온풍기를 타고 소문이 돌았다 햇살이 억울한 오후였다 - 이국형 - 2019. 5. 9.
문득 문득 늦은 김장으로 분주한 오후 절인 배추 위로 검불이 떨어졌다 무심코 올려다 본 하늘에 눈이 가득 들었다 마당의 목련이 주저주저 꽃방을 밀어 올려 감싸던 껍질들이 사소한 구호처럼 떨어져 내렸다 지난 봄 꽃샘추위로 쏟아졌던 백목련을 떠올렸다 뾰족 내민 꽃방이 수다스런 계집아이들 같아 보여도 빈 입술을 일제히 버리는 걸 보면 지난 일은 묻어두려나 보다 거두어들인 기억이 스스로 익을 때까지 견뎌내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을 것이다 동안거에 들 듯 입을 다문 채 몸을 열고 초겨울 한기가 제 몸에 스미도록 허락하고 있다 새봄 반짝 추위로 꽃잎이 까맣게 타들어 갈지라도 목련은 꽃잎에 하얀 겨울의 흰 피를 가득 모을 것이다 견디는 게 잘 사는 방법이라던 그날그날의 다짐들이 내 몸에서 절여지고 있다 올겨울 김장김치가.. 2019. 5. 9.
꽃의 명제 꽃의 명제 봄은 참이다 참을 나열하듯 꽃이 핀다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이 핀다 시들고 져 버릴 것을 분명 알면서도 꽃의 웃음은 화려한 절정의 유희를 위하여 짙은 화장 중이다 꽃이 없는 삼월은 모두 거짓이다 - 김주탁 - 2019. 5. 8.
똥가루 서말 똥가루 서말 오늘도 지리고 뭉개 놓으셨다 확 짜증부터 부린다 몸부터 닦아 드리고 락스로 바닥을 훔치고 문질러도 락스 냄새보다 진한 똥내 아이구 아이구 짜고 짜내는 걸레질마다 지청구가 서말이다 내 똥가루 서말은 달게 드시며 웃으셨을 어머니 그깟 냄새 한 홉 맡는다고 성질 부리던 못난 치사랑 그렇게 삐툰 투정 서말은 드시고 돌아가셨다 거친 역정 서말은 젖내처럼 달게 드시고 떠나가셨다 후회 한 되 눈물 한 말 그리움 한 섬 똥가루 서말 오월의 외상값 치르는 때 늦은 불효 뒤늦은 참회의 서말값은 어찌하랴 내 피와 살을 짜고 짜내도 영원히 갚지 못할 치부 어찌하랴 어찌하랴 손바닥만 한 가슴꽃자리 영영 잃은 나를 - 김주탁 - - 카네이션 달아 드릴 가슴 없어 더욱 가슴 저린 어버이날! 2019. 5. 7.
질경이꽃 질경이꽃 쥐와 새가 만났다 굴을 파고 숨어 사느니 날개를 달고 세상을 날겠다던 쥐는 새와 은밀한 거래를 하였다 새는 비행의 자유를 나누어 주는 대신 허공의 반에 대한 상호 불가침을 주고받다가 이분할 수 없는 하늘을 고민하였다 어리석은 세상이 입을 다문 사이 둘은 절묘한 협약 하나를 주고받았다 새가 둥지로 날아가며 어둠을 끌고 왔고 박쥐는 새가 버린 밤하늘에 날아올랐다 그것들이 낮밤으로 쪼아 먹던 집채만 한 탐욕의 수레바퀴가 지나간 자리 질경이 꽃이 피고 있었다 밟혀도 밟혀도 꺾이지 않는 풀 몸을 일으켜 하얀 꽃이 피고 있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 나는 꽃 질경 질경 피었다 - 김주탁 - -질경이 꽃말은 발자취다. 민중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주고 싶은 풀이다 2019. 5. 6.
꽃의 눈물 꽃의 눈물 전에 보았던 목련의 순결한 개화 이번에는 또 다른 모습이외다. 알만한 시인들이 꽃이 이렇고 저렇고 언어의 바다를 항해하지만 나에게 꽃은 굳어 버린 혀가 되어 버렸네 기쁨처럼 환히 웃던 나무 연꽃이 너 없이 피어나 환히 우는 꽃 꽃은 눈을 버리고 나는 눈을 감고 서로를 본다 꽃은 절로 피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아픔을 견디는 진통이었네 너를 잊으려던 짓이 그러하였지 어느 외진 시간의 정거장을 지나며 떠나간 사람을 얼굴하는 길에 꽃도 눈물을 뚝뚝 흘리더이다 가랑거리는 봄비에 뚝뚝 빗물로 소리 없이 울더이다 - 김주탁 - 2019. 5. 5.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산에서 만난 사람은 산이 되고 바다에서 떠나보낸 사람은 바다가 된다 열차에서 마주 앉은 사람은 서로의 종착까지 잠시 열차가 되고 살다가 헤어진 어린 풋사랑 하나쯤 나직한 그리움의 배경이 된다 사람과 사람은 따끈한 차 한잔의 향기처럼 서로에게 남을 수 있다면 미움의 옷을 다 벗어 보라 눈물의 옷까지 벗어 보아라 나는 가끔씩 부끄러운 알몸을 드러내고 사랑하는 너에게 간다 살다가 사람에게 사람이 되는 일 사람이 사람에게 사는 이유다 - 김주탁 - 2019. 5. 4.
고향유정 고향유정 까마귀도 고향 까마귀는 덜 검어 보인다더니 매화리 지나 자구티 넘어가는 길섶에 손톱만 한 풀꽃도 이쁘기만 하네 살아온 길을 되돌아가다 보면 사람의 세월만 시끄럽게 부스럭거리고 옹이 같은 기억들이 빼꼼거린다 평산리는 내 첫 울음점이다 억만 겁 시간의 연이 뒤섞여 오다가 몽고 낙관을 찍히며 내가 발아한 곳이다 밥보재 걷어 낸 싸리 광주리의 들 밥처럼 소담한 고향의 표정들이여 길은 멈추지 않고 노각같은 허리를 틀어 금강 쪽으로 굽어 나가고 봄날은 처녀의 젖가슴처럼 간지럽다 이별의 경계에 이르면 봉긋한 묏등에는 할미꽃이 피려고 애써 막 피워 내려고 꽃은 뿌리의 탯줄을 끊어 내고 있다 애틋한 삼월의 산문이 시작되고 고향에는 고향에는 포근한 유정만 남아 가슴속에 섬이 되고 있었다 - 김주탁 - 2019. 5. 3.
다 그래서 다 그래서 어쩌면 그 노래는 이미 불렸을지도 어쩌면 그 시는 벌써 적혀졌을지도 어쩌면 그 생각도 벌써 있었는지도 몰라 처음이라고 하는 주장들이 낯설지 않게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우리 안에, 먼 과거로부터 상상할 수 없는 미래까지 "사는 건 다 똑같아"라는 한마디 속에 담겨있는 것 같아서 어쩌면 나도 복제된 하나의 소비재 내 노래도 내 시도 내 생각도 다 그래서 다 그래서 바람도 같은 바람이어서 물도 같은 물이어서 돌고 돌뿐이어서 - 문철수 - 2019. 5. 2. 09:16 먼저 차용하는 자가 성공하는 자는 아닐까 2019. 5. 2.
불태운다는 것에 대하여 불태운다는 것에 대하여 공기가 잘 공급된 연탄불은 활활 불꽃도 거칠게 타올라 제 열에 스스로 구워지기도 하여 들판에 던져도 잘 깨지지 않고 한 생, 밟아도 부스러지지 않는 단단한 흔적을 남기는데 공기구멍 닫고 살랑살랑 조절하며 태운 연탄들은 갈아주려 집게로 잡는 순간에도 반으로 뚝 쪼개지기도 하고 골목길에 내 던지기만 해도 소갈머리 없이 부서지기도 하여 2019. 5. 1. 09:41 5월도 잔인한 달인가 - 문철수 - 노동절이 근로자의 날로 강제로 바뀐지 수십년이 지났다 그게 무슨 차이가 있냐고 따지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것 또한 군사독재시절 노동이라는 의미를 퇴색시키려는 의도로 기획된 것임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청정 바다는 아니지만 뻘물 짙게 밴 바다가 불과 5분 거리에 있다 30여년 전 본격적으로 .. 2019. 5. 2.
옥천역에서 옥천역에서 내 고향은 한반도 가운데 속의 한가운데 바다가 없는 내륙의 영토를 살았다 산과 들과 강으로 펼쳐 놓은 땅에서 통금이 없던 아비의 고된 시절은 보리쌀 같은 까칠한 가난을 섬겨 왔으니 푸른 금강의 이마에 사금파리 같은 별이 뜨면 야금야금 어미의 가슴이 쑤셔오던 밤 봉숭아 꽃잎 한장 한장 짓이겨져 무명실에 묶인 누이의 손톱을 붉게 먹었다 유리창에서 자라나던 손풍금 소리의 꿈아 꿈의 꿈속을 배회하던 어린 얼굴들아 시간의 저울은 점점 기울어져 가고 꽃잎 하나 떨어지는 소리가 쓰러지는 역 눈물의 심장에 박힌 그리움의 자궁에서 경부의 열차는 사탕 같은 별들을 매달고 입 다문 차창의 가슴을 덜컹거리며 플랫폼에 들어 오고 있었다 - 김주탁 - 2019. 5. 2.
직업 직업 새로운 초지에 도착한 유목민의 첫 일거리는 밤이 되기 전 머리 둘 곳을 찾아내는 것이다 누군가의 지난한 삶의 흔적이 짙게 새겨진 자리는 좋은 거처다 한숨과 함께 피어오른 담배 냄새와 등 긁은 벽엔 누런 시간이 두텁다 니코틴에 찌든 음모는 늘 욕실 배수구에서 세월을 꼬고 있으며 주방 배수구는 목이 졸리고 있다 그럼에도 지워지지 않는 시간은 없고 마지막은 내 땀방울로 잔내를 덮는다 하루하루가 가면서 나도 본적 없는 앞서간 자의 습관을 어느덧 당연한 듯 복사하고 있다 풀을 다 뜯고 나면 양들과 함께 황무지를 떠나 다시 길을 나선다 - 문철수 - 2019. 4. 30. 07:31 30여 년 만에 다시 인천, 첫 밤을 보냈다. 2019. 5. 1.
신록 신록 꽃눈은 꽃을 밀어내고 꽃은 잎을 끌어 올리던 운동회처럼 떠들썩했던 사월의 할례여 파발마처럼 달려오는 오월이 허공에 서서 휘적거리는 푸른 숨소리 저 잎 하나 바람에 흔들리기까지 저 잎 하나 햇살에 반짝이기까지 저 잎 하나 싱그러운 음표가 되기까지 사람의 어미가 그랬던 것처럼 나무는 뿌리에서 울고 또 울었다 - 김주탁 - 2019. 5. 1.
처지 처지 중부 이남은 종일 비가 내리고 서울 경기 동해는 비가 오지 않는다고 하니 너에게 전화 하면서 우산 얘기는 하지 않았다 내 입에서 나간 젖은 말들이 케이블을 상행하다가 수원쯤 지나며 바짝 말라 버릴 음색들 아니면, 하행하다가 젖을 너의 변음들 너도 양산 얘기는 하지 않았다 이 좁은 땅에서 말이다 - 김주탁 - 2019. 4. 30.
거미의 눈물 거미의 눈물 날줄을 긋고 씨줄로 획을 치며 끈적한 갈망의 그물을 펼쳐 놓고 기다리고 기다려도 걸려들지 않는 먹이 배 속에 우글 품은 씨알들 악착으로 밀어낼 기운도 없어 배고파 죽을 지경까지 참고 참다가 기다림의 본능도 미친 듯 버리고 내려와 날마다 들려오던 내 배설의 발치에서 시인의 눈물처럼 말라 죽었다 - 김주탁 - - 사월비와 똥간의 단상 2019. 4. 29.
부화 부화 원에 갇힌 새의 씨앗 품어 내던 체온에 신경이 떨리며 탯줄 없는 종란이 발아 한다 지독한 세상을 어떻게 알아차리고 껍질을 쪼아 깨며 얼굴보다 먼저 부리를 내밀었다 란수 젖은 날개를 펴기도 전에 노란 울음이 터졌다 모든 생명의 서가 그렇듯이 웃으며 태어나는 것은 세상에 없다 울음의 반증을 진화시킨 부리로 삐약거리며 깨진 껍질을 쪼는 병아리 세상에 입 하나 늘었다 - 김주탁 - - 암탉, 대가리며 벼슬이며 날개쭉지가 피투성이다. 담배 한대 피면서 아주 큰 수탉 놈에게 인간의 욕 몇마디 했더니 상단 횟대로 날아 올라 기세등등 울어댄다 두번째 닭장에서 종란의 부화가 시작되고, 거래처 사장님에게 부탁했다. 발톱이 쇠스랑 같고 부리는 호미 같고 벼슬은 붉은 혀를 오려 붙인 것 같은 저 수탉 놈을 잡을 때 꼭 .. 2019. 4. 27.
뜨거운 말 뜨거운 말 아버지, 한가지 물어봐도 되요 이 세상에는 행복한 사람이 더 많아요 불행한 사람이 더 많아요 글쎄다, 행복한 사람이 더 많다고 믿어 보는 것이 어떨까 내가 그렇게 알고 살아왔던 것처럼 네가 행복해지려면 말이다 기제 상을 물리고 뜨거운 탕국물 첫 숟갈 뜨다가 울컥 목이 메였다 - 어른들을 위한 동시 #44 - 김주탁 - 2019. 4. 26.
사월 비 사월 비 쥐와 밤고양이 봄꽃과 거센 비바람 술과 허름한 시인 천적의 경계 사이에 반복의 화음으로 줄기차게 쏟아지는 비의 랩소디 싸구려 영혼은 잔뜩 술독이 올라 초라한 마음을 자꾸 돌아눕게 하는 밤 사월 비는 참 짓궂다 - 김 주 탁 - 2019. 4. 25.
참꽃 참꽃 산골 소녀 볼빛 같은 꽃 이 산 저 산 연분홍 진분홍 붉다 떠난 후에 더 그리워 보낸 뒤에 더 사무치는 가신 임 설움 닮은 꽃 겉 가슴 속 가슴 연달래 진달래 붉다 혼절하듯 타오르는 꽃 빛 꽃불 번지는 사월의 고백이여 보들레르 혀끝 같은 너를 씹어 삼킨다 향깔스런 꽃살 구절구절 뜨거운 붉음으로 엉엉 꽃피로 울어 본다 눈 감으면 잊은 듯 돌아서면 더 더 불타버리는 참꽃 활활 타오르는 호수다 - 김주탁 - *참꽃 - 약한 독성이 있는 철쭉과 비교하여 먹을 수 있는 참진 달래꽃의 진달래의 딴 이름이다 2019. 4. 23.
만우절 만우절 만우절이라고 누구를 헛말로 놀려 주려던 일 그럴싸한 허구로 깜박 속이려 애쓰던 싱거운 너스레도 사라져 버렸다 만우절이 되어도 사람 사는 일이 다 거짓말 같아서 더이상 속을 것이 없어진 세상 그래도 알면서도 모르는 척 단 하루 만이라도 바보처럼 내가 나를 슬쩍 속여 봤으면 로또 일등 당첨! - 김주탁 - 2019. 4. 22.
봄비 봄비 옛날 그때 처럼 흠뻑 비를 맞아 봤으면 좋겠다 앞 머리카락을 타고 입술로 줄줄 흐르는 찬 빗물을 훅훅 불어가며 눈물 너머 너에게 걸어갔으면 좋겠다 보드란 속살까지 파르르 젖는 개나리 벚 목련 산수유 진달래 꽃길 따라 두 귀로 빗소리를 실컷 삼키며 세월 너머 너에게 찾아갔으면 좋겠다 사월 비는 또각 또각 길을 두드리며 늙어 가는 내 청춘 속을 시끄럽게 걸어오고 우산을 펼까 말까 남이 보면 주책 같을 이 망설임을 어찌하랴 - 김주탁 - 2019. 4. 21.
버려지는 것들 버려지는 것들 가옥이 아파트로 이사한다 자개장에 묻히던 손때는 숯 빛 옻칠 위로 매끈하게 남아 반짝인다 가만한 세월을 묵히며 담가 두던 속 깊던 오장의 칠 부쯤 되는 장독들 신문지에 겹겹 낯짝을 가리고 떠나가는 종지와 뚝배기의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함지박 같은 주둥이를 벌리고 뒤 따라 나온 헛일에 섭섭하게 웃고 있다 정별 뒤에 남는 군더더기 같은 눈물처럼 문짝을 뜯긴 딱지 붙은 장롱에 묵묵 기대어 떠날 때는 버려지는 것들 장사 하다가 대전역까지 한사코 마중 나오던 어미의 그 가슴처럼 웃고 있다 - 김주탁 - 2019. 4.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