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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자료]/say no의 가르침

나의 어린시절과 아버지

by 김PDc 2009. 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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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린 시절과 아버지

나의 아버지는 북한이 고향인 의사로서 6.25 때 남하하였다. 아버지의 원적 때문에 나는 공군에 입대한 당일, 신원조사가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귀향조치를 당하기도 했다. 지금도 북한에는 얼굴도 모르고 생사도 모르는 형들과 누나들이 있지만 남한에서는 내가 나이 어린 장남이었고 친척도 없었다.

살림집이 딸려 있던 병원에는 의사 3,4 명과 간호사 7,8명이 있었고, 코흘리개 시절부터 나의 놀이터는 골목이나 운동장이 아니라 병원 대합실과 치료실(칸막이가 쳐 있지 않았다)이었다. 1960년대 국민학교 시절 까지는 “비교적”잘 살았던 것 같으나 의사라는 직업을 부자가 되는 도구로는 사용하지 않았던 아버지였기에 절대로 부자는 아니었다. 그나마 국민학교 시절에 이미 아버지가 엄청난 사기를 당하면서 집안은 재판에 휘말렸고 빨간색 차압 딱지가 은 수저에 까지 세 번 붙더니 중3때, 말 그대로 길거리로 내쫓겼는데 가재도구가 손수레 하나도 안되었다. 우리 집은 그렇게 몰락하였고 나는 환갑이 다 된 아버지의 눈물과 한숨을 처음으로 보았다.

왕진 가방마저 압류 당했던 연로한 아버지는 약간의 정치적 연줄을 갖고 있던 덕분에 무의촌 보건소장이 되었으나 결국 심장마비로 돌아가시고 월셋방 한 칸과 빚만 남았다. 구멍가게를 하면 가장이 세상을 떠나도 유가족이 생계를 꾸려 갈 수 있으나 전문직인 경우는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 가족은 빚까지 있었으니 정말 쩔쩔 맸다. (어릴 때 있었던 그 파산의 영향으로 나는 현금 20억원을 모을 때 까지 돈을 쓰지 않았는데 그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비를 피할 수 있는 튼튼한 우산을 갖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식들에게 아무 것도 남기지 않은 아버지를 나는 철없던 시절, 원망도 많이 하였지만 세상을 살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어릴 때 받은 가르침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가 망치를 가져오라고 했을 때 망치만 가져가면 꾸중을 들었다. 뭘 하시려는지 눈으로 보고 못까지 크기별로 챙겨가야 했다. 담배를 사오라고 하여 담배를 사다 드리면 꾸중을 맞았다. 재떨이와 성냥, 물까지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느 겨울 그렇게 모든 것을 준비하여 갖다 드렸음에도 아버지는 혀를 쯧쯧 찼다. 영문을 모르는 내게 떨어진 말, "사내새끼가 머리가 그것 밖에 안 돌아가면 어디에 쓰겠냐. 담배를 피면 연기가 나오지?”창문을 조금 열어 놓으라는 뜻이었다.

한번은 무릎에 상처가 났는데 머큐로크롬을 직접 발라보라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대강 바르는 것을 보더니 "사내새끼가 약 바르는 것을 수없이 보았을 텐데 눈뜬 장님이었다"고 꾸중하였다. 그리고 간호사를 한명 부르더니 약을 발라주라고 하였다. 치료가 끝나고 나가려는 데 아버지가 "뭘 보았느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을 못했기에 야단을 또 맞았고 또다시 약이 발라졌다. 비로서 나는 약솜이 상처 위에 놓인 뒤 원을 그리며 밖으로 나감을 알았다. 그래야 세균에 감염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지만 나는 불과 6살인가 7살이었다.

그런 교육이 모두 국민학교 저학년 시절에 수없이 이루어졌다. 아버지가 내게 심어주려고 한 것이 어떤 일 전체의 뼈대를 보는 능력이었고 일을 하는데 있어서의 세부적인 것을 놓치지 않는 방법론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은 내가 이 세상을 홀로 살아가기 시작하면서부터 였다. 내가 남들보다 일을 더 잘한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어린 시절, 나는 장난이 매우 심했었다. 국민학교 시절, 한번은 카바이트 불이 신기해서 1리터 짜리 링겔 병에 카바이트를 담아 놓고 불을 붙였다가 “뻥”하는 소리를 내며 고무마개가 튀어나가면서 폭발을 일으킨 적도 있었다. 링겔병 속의 굵은 유리관을 카바이트 개스 토출관으로 사용하는 바람에 불길이 병 안으로 역류되어 일어난 폭발이었다. 원래 카바이트 개스 토출구는 바늘 구멍 크기가 되어야 하는데도 나는 토출관이 굵으면 불꽃도 엄청 클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또 한번은 병에 실을 감고 석유를 실 위에 뿌리고 불을 붙인 뒤 뜨거워졌을 때 찬물에 넣으면 병이 쩍 갈라지는 것이 재미있어서 몇 차례 장난을 하다가 석유 대신 라이터 기름을 뿌린 것이 원인이 되어 집에 불을 냈었다. 흰색 양잿물 덩어리를 박하 사탕인줄로 알고 먹었다가 위를 세척하는 등의 소동이 일어난 적도 있다. 암실문을 열어 놓은 채로 엑스레이 필름통을 여는 바람에 필름을 못쓰게 만든 적도 있었는데 엑스레이 담당자는 기계고장으로 알고 난리를 쳤었다. 중학 1년 당시에는 딱총 화약을 전부 까서 가루로 만들기 위해 두 손으로 비비다가 그만 마찰열 때문에 화약이 폭발하여 열 손가락 모두에 화상을 입은 적도 있다. 내가 어릴 때 저지른 장난은 끝이 없다. ( 나이 50이 된 지금도 나는 종종 가족들에게 장난을 친다).

자상함은 전혀 없었던 아버지였지만 신기하게도 내가 저지른 장난에 대하여서는 결코 야단을 치지 않았다. 그저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말아라”는 정도였다. 그러나 내가 같은 장난을 또 하게 되면 엄청난 꾸중을 들었다. 자식들에게 매를 드는 분은 아니었으나 당신이 하나를 말하면 내가 열을 알기를 바랬기에 아버지는 어린 나에게는 두렵기도 했고 언제나 나를 가르칠 때 마다 빠지지 않은 서두는 “사내새끼가…”였다. 지금도 내 귀에는 아버지의 강한 북한 사투리가 생생하다. "사내새끼가 머리가 그것밖에 안 돌아가면 어디에 쓰겠냐?"

아버지와 대화다운 대화는 나눠보지 못하였다. 워낙 성격이 무뚝뚝하기도 하였지만 대화라는 것을 하기에는 내가 너무 어렸고 아버지는 너무 연로하였다.

국민학교 시절, 나는 “땡이”가 등장하는 만화를 대단히 좋아했으며 어른들이 물었을 때의 꿈은 과학자가 되는 것이었다. 지긋지긋하게 과외에 매달렸지만 일류 중학교 입시에서 낙방한 뒤 중간 정도의 중학교에 들어갔고 동계진학으로 같은 고교까지 가게 된다. 중고교 시절 내내 나는 공부를 등한시하였지만 아버지에게서 야단 한번 맞지 않았다. 고등학교에서 문과와 이과로 나누어질 때 어느 것이 좋겠냐고 여쭙자 답변은 그저 "기술자가 되라"는 것 뿐이었다. 기술자만이 세상이 바뀌어도 살아 남는다는 것이었고 의사도 기술자라는 것이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서 독일 나치군이 유대인 기술자들은 살려주는 장면을 보았을 때 나는 아버지가 생각났다.

아버지가 내게 해 준 또 다른 말은 “돈을 벌려고 의사나 변호사가 되면 안된다”는 것이었다(지금의 내 생각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아버지는 자신이 의사이면서도 다른 의사들(그 중에는 내 친구의 아버지도 있었다)을 “의새”라고 부르고 변호사를 “변호새”라고 부르곤 했는데 여기서 “새”는 새끼의 준말이었다. 같은 의사였던 내 친구의 아버지가 병원 건물을 수리하고 간판을 네온사인으로 달고 대기실을 화려하게 만든 것을 보고 내가 아버지에게 우리는 왜 그렇게 안하느냐고 물었을 때 아버지는 “병원은 환자를 치료하는 곳이지 여관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병원이 화려하면 결국 환자들에게 손해가 된다는 것을 내게 가르쳤다.

의사라는 직업을 돈 버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인지 아버지는 별도의 돈 버는 사업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수술할 때 조명 역할을 하는 무형등을 제조하여 다른 병원들에 판매하기도 하였고 간척지 사업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기로는 성공한 것은 별로 없었던 것 같고 사기만 잔뜩 당할 뿐이었다.

아버지가 또 내게 해 준 말은 "많이 배워 높은 사람이 되면 세상이 바뀌면 죽는다"는 것이었다. 일제시대,공산치하, 6.25, 4.19, 5.16 등을 거치며 세상이 여러 번 뒤집히는 것을 체험하면서 고위관리들이 고초를 겪는 것을 보고 내리신 결론이었다. 그래서인지 공부 열심히 하여 높은 사람이 되라는 말은 한번도 듣지 못했다. 재판에 휘말리며 고생을 하였지만 검사나 변호사가 되라는 말도 없었고 단 한번도 당신의 직업인 의사가 되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병원 대합실에서 노는 것을 허락하고 수많은 수술 장면들을 보여주었을 뿐인데 "의사가 뭘 하는지 잘 보아라"는 정도 였지 단 한번도 내게 느낌 같은 것도 묻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여 보면 중학교 2학년이었던 나에게 출산 장면을 보여 주거나 수술 도중 환자의 창자에서 꿈틀대는 기생충들을 보여준 것,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내게 음독자살을 시도하여 혼수상태에 빠진 아름다운 20세 처녀의 음부에 요도파이프를 끼어 넣는 장면이나 물에 퉁퉁 불어 반쯤 썩은 시체의 뱃속을 보여준 것 등등은 좀 심했다 싶지만 아마도 인간 육체의 실상을 빨리 직시하라는 뜻이 강하였으려니 생각한다. 심지어 성병에 걸려 절단한 성기를 포르말린 병에 집어 넣고 내게 구경 시키며 성교육을 시킨 사람도 아버지였고 매독균이 최장 10년 이상 잠복기를 갖는다는 것도 나는 아버지에게서 배웠다.

하지만 병원 놀이터에서 육체의 실상만 알게 된 것은 아니었다. 나는 60년대 그곳에서 학교에서 배운 많은 것들이 “쌩 구라”라는 것도 알게 된다.

국민학교 교과서에서, 늙은 할머니가 길을 안전하게 건너가도록 도와주는 민중의 지팡이로 묘사된 경찰은 교통사고를 당해 피를 흘리는 환자를 병원에 데리고 왔지만 돈봉투를 받지 못하면 다른 병원으로 데려가는 모습도 내게 보여 주었다. 교사들은 지극히 고마운 분들로 교과서에는 묘사되어 있었으나 육성회 회장이던 아버지에게 찾아 온 그들의 모습은 전혀 딴판이었다. 문관의 제왕으로 교과서에 나오던 기자들은 병원에서 환자 한명이 죽으면 벌떼 같이 모여들어 돈봉투를 받아가던 사람들이기도 하였다. 법과 정의를 지킨다는 검사와 변호사와 판사들을 어머니나 아버지가 재판 문제로 만나러 갈 때는 언제나 그 명칭 뒤에 “새끼”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었고 보자기에는 현금다발이 가득 담겨 있었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온 의사 부부 중 여의사는 내가 보기에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여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남편 의사는 자신의 신분과는 전혀 맞지 않는 여자와 외도를 하고 이혼을 하였다. 키스는 아름다운 사랑의 표식 이라지만 키스 하면서 남자에게 혀를 물려 잘려진 혀를 들고 입 주변에 온통 피를 흘리며 온 창녀도 있었다.

아버지는 나이 어린 나에게 이러한 인간의 짓거리들을 직,간접적으로 모조리 보여 주었다. 돌이켜 보면 이런 모든 것들을 국민학교 시절에 보면서 나는 삶의 더러운 실상과 인간의 사랑과 증오마저도 조금은 엿보았던 것 같다. 벽에 난 구멍을 통해 옆 방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실제로 엿보았던 주인공이 바로 그런 내용을 상상하여 소설로 발표한 소설가에게 “당신의 소설은 실상과 틀리다”고 면박을 주는 앙리 바르비스의 소설 ‘지옥’은 그래서 내게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배뱅이굿을 즐겨 들었던 아버지는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생전에 부탁을 하였었는지 제사를 지내기는 하면서도 내게는 그 의미를 축소시켜 “나 죽으면 이런 짓 절대 하지 말아라”고 강요하였다. 급한 환자가 오면 제사를 완전 취소하기도 하고 다른 날 지내기도 했으며 술 대신 사이다를 사용하기도 하였고 제사상에 음식을 올려 놓는 원칙 조차 “편한 대로 하면 되지 무슨 격식이냐”고 하였던 분이다. 격식을 싫어하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나는 사업을 하면서 단 한번도, 정말 단 한번도 시무식이니 종무식이니 개업식이니 같은 것을 해 본 적이 없으며 제사도 지내지 않는다.

“쌀밥을 먹으면 비타민이 부족하다”고 아버지가 내게 어릴 때부터 하루에 한 알 강제로 먹였던 비타민 삐콤을 아직도 내가 매일 아침 한 알씩 먹듯이(지금은 ‘삐콤씨’이다) 나는 아직도 아버지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

sayno@korea.com , http://cafe.daum.net/saynolove 에 2004년 6월에 기고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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