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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형5

두 번째 혹은 맨 아래 자리 두 번째 혹은 맨 아래 자리 해가 길어지면서 연말의 일들도 기억에서 멀어졌다 오랜만에 직장후배 L과 밥 약속을 하고 “누구랑 밥 먹을지 모르는 게 퇴직이다”라는 말을 불쑥 건네고 말았다 셔츠를 입을 일이 없어진 나는 단춧구멍을 잘못 꿰었다 봄날 꽃 피는 순서도 아닌데 신경 쓸 일 없다면서 단추를 받아준 자리를 만져봤다 목에서 배꼽 방향으로 세 번째 자리, 잘못 없이도 일상에서는 죄송한 두 번째 자리, 어긋나지 않도록 길들여진 자리, 넥타이를 잠시 넣었다가 민망하게 열려있는 자리 순댓국과 소주로 실없는 저녁을 먹었다 집으로 돌아와 셔츠를 벗으면서 내 자리가 궁금했다 맘 놓고 풀지 못하는 배꼽에서 목 방향으로 여섯 번째 자리? 눈치 없는 누구든지 매달릴 수 있는 어중간한 자리? 계속 끼우다보면 잘못 끼운 것.. 2019. 5. 9.
낚시의 기억 낚시의 기억 아버지는 늘그막에 농사일을 배웠다 아픈 어깨를 두고 농사 탓을 했지만 농사를 모르는 내 어깨가 아픈 것을 보면 아버지의 진단은 틀렸었다 석양의 목덜미가 물속으로 빠질 무렵이면 나는 낚시를 던졌다 반원을 그리던 별이 찌를 건드리면 잔물결이 일었다 먼 조상이 물고기 모양이었다고 했다 내 몸에는 비늘에서 미늘로 생존방식을 바꾼 이유가 남았을 것이다 다음 조상은 물고기 낚는 기술을 전했을 것이다 검은 산 그림자가 흔들리다 말없이 물 아래로 내려가곤 했다 밤새 낚시를 들어올렸다 미끼를 따먹고 달아나는 붕어가 쓰다가 밀쳐 둔 글줄을 닮았다 물에 뜬 별이 지워질 때까지 나는 낚시의 기억을 살려내지 못했다 내일은 근로계약서에 서명하는 날이다 어깨 통증을 느끼며 낚싯대를 접고 물비린내 나는 손을 씻었다 풀죽.. 2019. 5. 9.
구절초가 구절초에게 구절초가 구절초에게 배와 내가 땅 속 뿌리로 이어진 지 오래니만큼 염치없지만 부탁을 좀 해야겠네 철없는 이월 햇살이 여물다고해도 얼마나 여물 수 있겠나 그 햇살에 더러 언 땅이 녹더라도 내 몸을 천천히 좀 밀어주게 겨우내 움츠렸다 줄기까지 마른지 오래지만 꽃을 피워내던 감각이 생생하게 살아남아 밀리는 그 끝이 아프고 아프다네 꽃 보던 시절 우악스런 낫질에 목이 잘리고 한 다발씩 묶여서 빈 처마에 매달렸다가 약탕기에서 끓어 넘치는 게 나을 뻔했다고 속에도 없는 혼잣소릴 되뇌게 해서야 쓰겠나 성하던 목숨도 시들고 비틀리다 보면 혼자 서 있기도 여간 힘든 게 아니라네 봄 눈 녹으면 스스로 몸 끊고 누울 것이니 후배님 몸도 생각하면서 천천히 밀어주게 엄살이 아니라네 그대도 한 번의 봄을 남겨두고 있지 않은가 -.. 2019. 5. 9.
풍경 풍경 회의는 오후 세시에 열린다고 했다 유리창을 뛰어 넘은 햇살이 회의실 바닥으로 떨어지며 소집을 알렸다 모이는 사람들은 순서가 있어 생각이 많은 이가 생각이 없는 이보다 먼저 왔다 회의가 생기는 회의일수록 눈치껏 끄덕이거나 혹은 눈치를 채지 못하게 끄덕끄덕 거렸다 알 만한 상황이고, 알 만한 사람만 참석했는데 예상과는 다른 일이 벌어졌다 회의가 좌우로 튀다가 진보의 햇빛과 보수의 눈빛이 햇빛과 눈빛을 서로 바꾼 것이다 별일 없었다고 수습은 했지만 눈곱만큼도 관련 없는 햇살이 멱살을 잡혔다 늦게 와서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이들 때문이라고 회의실 구석 있던 온풍기를 타고 소문이 돌았다 햇살이 억울한 오후였다 - 이국형 - 2019. 5. 9.
문득 문득 늦은 김장으로 분주한 오후 절인 배추 위로 검불이 떨어졌다 무심코 올려다 본 하늘에 눈이 가득 들었다 마당의 목련이 주저주저 꽃방을 밀어 올려 감싸던 껍질들이 사소한 구호처럼 떨어져 내렸다 지난 봄 꽃샘추위로 쏟아졌던 백목련을 떠올렸다 뾰족 내민 꽃방이 수다스런 계집아이들 같아 보여도 빈 입술을 일제히 버리는 걸 보면 지난 일은 묻어두려나 보다 거두어들인 기억이 스스로 익을 때까지 견뎌내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을 것이다 동안거에 들 듯 입을 다문 채 몸을 열고 초겨울 한기가 제 몸에 스미도록 허락하고 있다 새봄 반짝 추위로 꽃잎이 까맣게 타들어 갈지라도 목련은 꽃잎에 하얀 겨울의 흰 피를 가득 모을 것이다 견디는 게 잘 사는 방법이라던 그날그날의 다짐들이 내 몸에서 절여지고 있다 올겨울 김장김치가.. 2019. 5.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