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 줄이 다 되어도 그의 손에서 기타는 생명과도 같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얇은 지식이나 기교는 이제 그에게 허상에 불과하다. 모든 예술인이 그렇듯 삶을 가슴으로 받아들일 때 그들의 재능이 부활하듯 오늘도 오선지를 펼쳐놓고 노래라는 생명을 그린다.
그가 끊임없이 노래라는 재능을 기부하며 인생을 살 때 그의 노래로 새로운 삶의 활력을 찾는 이들을 발견한다. 마치 마약과도 같은 짜릿한 희열을 느낀다. 그것이 그의 삶의 방식이다. 돈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스스로 기부하기도 한다. 그리고 여기저기 그의 뜻에 동참해주는 많은 동료들을 보며 항상 감사의 하루를 산다.
그는 자신의 노래 ‘사십이 이십에게’를 부르며 젊은 세대만큼은 기성세대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를 바란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그는 거리로 나가 노래를 부를 것이다. 육체가 허락하는 동안… 지금부터 노래로 재능을 기부하는 인디밴드 ‘파인애플’ 리더 박홍순을 만나보자.
김 기자 : 음악을 처음 접한 것은 언제쯤이신가요?
박홍순 : 고등학교 2학년 때였어요. 기타를 보는 순간 너무 좋아서 부모님께 사달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공부해야 된다고 사주지 않으셨어요. 사실 당시만 해도 가격이 만만치 않은 점도 있었겠지만요. 그러다가 제가 병원에 입원할 일이 생겼죠. 그것도 약간 장기로…….
그러던 어느 날 형님이 기타를 사 가지고 오신 거예요. 너무 좋았어요. 아픈 것도 잊을 정도로 말이죠. 미친 듯이 기타를 친 것 같아요. 눈뜨고 있으면 기타를 잡고 있고 눈감으면 기타를 안고 자고 있고 그렇게 한 달 정도를 병원에서 보냈어요. 그것이 기타를 접하고 음악을 시작한 계기였어요.
김 기자 : 그럼 기타나 음악에 대해서 후에 전문적으로 배우신 적이 있나요?
박홍순 : 전문적으로 배운 적은 없어요.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녔어요. 그때 교회에서는 어렵사리 운영되던 밴드가 있었죠. 아마도 음악에 대한 갈망은 선배 형들의 연주하는 모습에서 발생된 것 같아요. 병원에서 퇴원하고 우연하게 교회 밴드의 기타를 잡게 되었지요.
그때 한 선배가 그러는 거예요. “야. 너 언제 기타를 배웠어?” 그때부터 같아요. 선배들이 저를 예쁘게 봤는지 화성학 책이라든지 음악 통로 등의 책을 건네주었고 참 정신없이 책을 읽었어요. 문무를 겸비한다는 말이 있죠. 이론과 실기를 계속해서 병행했죠. 물론 선배들의 도움 또한 대단했고요. 지금도 그 선배들께 항상 감사드리고 있어요.
김 기자 : 음악을 그냥 취미로 하실 수도 있었잖아요. 그런데 작사 작곡이라든지 가수로 진입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으신가요?
박홍순 : 대학교를 공대로 선택했는데 떨어졌어요. 사실 고등학교 때 두 번 대수술을 받았어요. 내신도 엉망에다 점수도 잘 나오지 않았죠. 그래서 서울로 재수하러 올라갔어요. 그러던 어느 날 대전에 잠깐 내려왔는데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 쇼’에서 들국화의 노래를 듣게 된 거예요.
그때부터는 정신이 하나도 없더군요. 들국화 음반도 나오지 않았고 그래서 LP판 가게를 기웃거리며 대전에 눌러 앉았어요. 들국화 음반이 나오고 LP판을 손에 든 순간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얻은 듯한 느낌? 뭐, 거기서부터 시작된 것 같네요.
김 기자 : 무대에서 노래를 시작했던 것은 언제부터인가요?
박홍순 : 제가 군에 입대할 당시에는 출퇴근하며 복무하는 18개월 방위병 제도가 있었죠. 수술 후유증도 있고 해서 방위를 가게 됐어요. 입소하는 날부터 기타치고 노래 좀 하니까 계속 시키더라고요. 자대 배치 후에도 참 편했던 것 같아요. 기타 가르쳐 달라, 이 노래 불러라, 저 노래 불러라, 동기들이나 바로 위 고참들은 뺑뺑이를 치는데 저는 노래를 부르거나 기타를 가르치고 있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주변에서 제가 미웠을 것 같아요.
그러던 어느 날 동기 녀석이 조용히 이야기하더군요. “너 노래한 번 해볼 생각 없냐?” 나중에 알고 봤더니 입대 전에 유흥업소를 관리하던 친구였어요. 그래서 저녁에 가발 쓰고 호프집에서 노래를 시작하게 됐어요. 소집해제 후에 빌보드 음악 감상실 무대에도 오르고 참 많이 활동했지요. 그때는 사회적 분위기가 그랬죠. 생맥주와 기타 그것은 현대인의 필수다 뭐 그런 분위기 있잖아요. 그때 당시 활동했던 친구들 중 제 중학교 동창 신승훈도 있고요.
김 기자 : 그러면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내 음악을 하셨다는 말씀이신가요?
박홍순 : 약 10여 년의 공백 기간이 있었죠. 사업을 시작했는데 IMF을 맞이한 거예요. 문제는 제 사업이 아니라 두 개의 보증을 서준 것이 문제가 되었죠. 빚에 이자, 이자에 이자 어느 순간 감당이 되지 않더군요. 사실 죽음을 생각하기도 했어요. 종교인이 아니었다면 지금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도 있었지요. 아등바등 살았다는 표현이 맞을 거예요.
어느 정도 빚을 해결할 무렵 조금 여유가 생기더라고요 그때 선배들을 만났어요. 그 전까지는 사람들을 많이 피했는데 그때 만나 선배들께 나 이렇게 살았다 말하니 웃더군요. 저만 그렇게 산 것이 아닌 거예요. 저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사신 분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죠. 그래서 음악을 다시 시작한 겁니다.
그것이 딱 10년 걸렸네요. 그때 당시 만든 밴드가 ‘파인애플밴드’죠 파인애플은 상처 난 사과 즉 파인 사과라는 뜻 이예요. 제가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 음악밖에 없으니까 음악으로 마음에 상처 난 사람들을 보듬어 주자는 취지로 만들었고요. 거리 공연, 지하철 음악여행 공연 등 불러주는 어디든 달려가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어요.
김 기자 : 요즘은 또 다른 나눔 공연을 하신다는 말씀을 들었는데, 어떤 공연인가요?
박홍순 : 순수한 재능기부 모임 ‘모나미’ 모으고 나누는 아름다운 친구들이라는 취지인데요. 음악인뿐만이 아니라 미술, 마임, 마술, 문학인 등 나눌 수 있는 모든 분들이 동참하는 모임입니다. 세월호 희생자 추모 공연을 시작으로 독거노인, 결손가정의 아이들, 다문화 가정, 외국인 노동자들을 돌보는 ‘섬나의 집’ 공연까지 찾아가는 공연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시큰둥하던 후배들도 공연이 끝나고 늦은 저녁 전화를 했더군요. 사실 별 관심이 없었는데 공연을 마치니 가슴이 벅차오른다고 다음 공연에는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겠다고, 또 한 친구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접근했는데 공연을 마치고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고 미안하다고 순수 재능 기부에 적극 동참 하겠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때는 오히려 제 자신이 흥분되기까지 했죠. 참 잘 했구나, 라는 ‘자화자찬’인가요?
인터뷰 도중 1997년 대학가요제 본선 진출 출신으로 2003년도에 ‘더본’이라는 이름으로 ‘행복한 세상’을 발표했던 모나미 회원 최종호 씨가 방문한다. 모나미의 다음 공연에 대한 상의를 하고 선후배들의 중간 다리 역할을 톡톡하게 한다는 박홍순 씨의 소개를 듣는다.
김 기자 : 최종호 씨가 본 모나미에 대한 생각은 어떤가요?
최종호 : 음악을 하고 음반을 내다보니 만나는 사람도 참 많고 모임도 많아지더군요. 성격이 누군가를 리드하지는 못하지만 나오라면 꾸역꾸역 잘 따라 다니는 편이었는데 어느 순간 다 접게 되더라고요.
쉽게 말해서 놀고먹자 식으로 큰 의미가 없어진 겁니다. 그러던 중 모으고 나누는 아름다운 친구들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이거다 하고 생각한 거예요.
대부분 음악하는 친구들이 자존심이 강해요 그래서 잘 융합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 부분을 다방면 예술인들 그리고 사회인들과 모여서 나눔의 행사로 승화시키는 작업을 하니 이기적이었던 후배들이 또 다른 무엇인가를 느끼는 것 같더군요. 또 사회 전반적인 정보들을 공유할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앞으로도 많은 분들이 참여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김 기자 : 박홍순 씨는 음악 방송 ‘씽씽토크’를 진행하셨는데 계기가 있으셨다면?
박홍순 : 음악하는 친구들을 보면 감성도 좋고 착한 친구들이 많은데 대부분 자기 관리를 제대로 못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공연 당일 날 펑크를 내는 친구들부터 연락이 두절되는 친구들까지요. 그런데 시대적으로 이제는 그렇게 하면 되지 않거든요.
인디란 스스로 자기를 경영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인디 밴드들 대부분이 자기 경영에서 실패하는 것 같아요. 씽씽이란 생각하며 노래하란 뜻으로 씽씽토크는 그런 쪽에서 접근을 한 것이죠. 재능 있는 뮤지션들을 노출시켜주고 생각하게 해주는 작업, 지금은 세월호 참사 이후에 잠시 손을 놓고 있는데 9월이면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김 기자 : 마지막으로 음악을 하고자 하는 분들과 선후배 분들께 하고 싶으신 말씀 부탁드립니다.
최종호 : 음악을 한다. 참 어려운데요. 저는 꾸준한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슈퍼스타K 오디션 프로그램들을 보면 막연하게 노래연습 춤 연습에 치중하는데 노래가 아닌 몸으로 표현하는 가수들을 많이 봐요 참 안타깝죠.
음악은 음악으로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음악을 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공부하고 또 공부해야만 다음 노래를 준비할 수 있고 실패하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 시작할 수 있잖아요. 저도 처음 음반 ‘행복한 세상’을 실패하였지만 끊임없이 준비하고 공부하고 재능 기부에 참여하면서 다음 음반을 준비하고 있거든요. 조만 간에 디지털 음원으로 찾아 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박홍순 : 획일화된 음악 공장에서 찍어내는 음악들에 빠져가는 것 같아요. 내 노래를 하는 것이 아니라 교수 또는 강사의 음을 따라가서 결국 모든 음이 비슷한. 그러니까 내 노래가 없어지고 뻐꾸기의 노래 또는 음악이 되는 것이죠.
그것이 제일 안타까워요. 음악을 하면서 철학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음악학원에 보컬이 제일 많이 모집된다고 그러더군요. 청소년들이…… 이 이야기는 무엇이겠어요. 악기는 어려우니 싫고 노래는 그냥 저냥 하겠다는 생각이죠. 공부하기 싫어서 음악하는 친구도 많고 연예인의 화려함만 보고 실력도 되지 않으면서 하는 친구들도 많아요.
그냥 음악이 좋아서 하는 친구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전 국민이 음악뿐만이 아니라 예술이라는 장르를 이해하고 그것이 서로 공유될 때 대한민국 진정한 문화선진국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래서 음악으로 재능을 기부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김 기자 : 오늘 두 분 좋은 말씀 감사드리고요, 앞으로도 좋은 음악으로 만나 뵙기를 기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10평 남짓한 박홍순의 스튜디오를 나서며 그와 나눈 이야기를 다시금 떠올려본다. “인간이 소유한 재능은 자신만의 것이 아닌 우리 모두의 것이다.” 그가 나눔을 실천하는 이유는 딱 한 가지 내가 나눔으로 인해서 내게 나눔을 받은 사람이 또 누군가에게 나눔을 주면 그런 나눔 들이 모여서 세상은 아름답게 변하리라는 희망 때문이다.
그는 오늘도 재능 나눔 ‘모나미’의 기획을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언제든 어디서든 그의 노래가 필요한 곳으로 달려갈 준비를 하고 있다. 유명 연예인 인기 가수는 아니더라도 소외 받고 외로운 사람들의 마음속에 다가가 따뜻한 영혼의 울림을 안겨주는 진정한 가수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본 글은 '월간地酒' 2014년 9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자료[영상.방송] > 기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으고 나누는 아름다운 친구들 _ 김 기자의 좌충우돌 인터뷰 (0) | 2015.06.12 |
---|---|
우현의 전원주택 _ 김 기자의 좌충우돌 인터뷰 (0) | 2015.06.08 |
수의사와 보신탕 _ 김 기자의 좌충우돌 인터뷰 (0) | 2015.06.04 |
그녀, 자연인 권숙정 _ 김 기자의 좌충우돌 인터뷰 (0) | 2015.06.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