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톤 박경종은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KBS 신인음악회 ‘삶과꿈콩쿠르’에서 입상했다. 도이하여 베르디 국립음악원을 졸업하고 올해 최고의 디플로마토로 선정되었다. 베르디국립음악원 초청 독창회를 하였고 줄리엣따시묘나토국제성악콩쿠르에서 대상을 받았다. 산레모국제성악콩쿠르에서 대상 및 이탈리아 대통령상을 수상하는 등 이탈리아 유수의 콩쿠르에서 입상하였다. 현재 서울대학교와 가톨릭대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김기자 : 인터뷰 하자 하자 해놓고 딱 반년 걸렸네요. 아무튼 만나서 반갑습니다.
박경종 교수 : 그러게 말입니다. 이렇게 만나게 됐으니 목적은 달성했다고 보는데요. 저도 반갑습니다.
- 오늘 공연에 대해서 설명 부탁드립니다.
오늘 공연은 ‘사랑의 묘약’인데요. 간단히 말하자면 어떤 동네에 바보 같은 친구가 하나 있는데 꽤 예쁘고 똑똑한 지주의 딸을 좋아하게 된 거예요. 그런데 이 지주의 딸이 바보를 좋아할 리가 없잖아요. 때마침 이 동네에 들어온 약장수에게 사랑의 묘약을 찾는 데서 시작되는 에피소드입니다. 단순하지만 참 재미있는 이야기죠.
- 성악을 선택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요?
성악을 좋아 했었는데 집에서 못하게 하니까 삐뚤어 졌고 삐뚤어지다 보니까 부모님께서 어쩔 수 없이 허락했어요. 집에서 나가라는 말까지 들었을 정도로 엄청나게 반대했어요. 클래식이라고 하더라도 딴따라라고 생각을 하신 거죠. 사실 딴따라 맞기는 하지만…….
- 그래도 일반 대중음악과는 다르잖아요. 클래식하면 고상하고, 무언가 있어 보이고 그 점에 대해 부정하는 발언인데 한말씀해주시죠.
대중가요가 우리가 하는 작업보다 쉽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아요. 더 힘든 부분도 있고 대중 가수들이 더 전문성을 가진 경우도 많아요. 다만 성악가의 시각으로 보면 대중가요가 쓰고 있는 음악적인 뼈대가 조금 더 간단하다 뭐 그 정도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대중가요는 대부분 3분 40초 이상 넘어가지 않거든요. 그 안에서 메시지를 전하다 보니까 단순한 화성과 멜로디를 쓸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클래식은 더 자유롭고 깊이 있게 들어갈 수 있지요.
- 2시간 공연이면, 그 가사를 다 외울 수 있나요?
7시간짜리 오페라도 있는데요. 성악가들이 좋은 목소리로 노래하는 직업이라기 보단 외우는 직업이라고 봐야 되요. 새로운 작품을 받으면 빨리 외워야 다음 연습 단계로 넘어가죠. 성악은 많은 시간과 재능이 필요하고 거기에 부수적으로 많은 비용이 들어요. 저도 음악을 시작한지 벌써 30년 가까이 되는데 그 동안 배우려고 투자한 돈을 평생 뽑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죠. 하하.
- 대략 얼마나 들어가나요?
보통의 코스는 예술고등하교, 대학교, 대학원 나오고, 거기다 유학 갔다 오면 10억 이상 든다고 해요. 10억 정도 쓰는 친구들이 많이 있어요. 악기 값은 별도고요.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공부를 해도 먹고 살 수 있는 시스템이 되어 있질 않아요. 많은 투자를 해서 공부를 하고 왔는데 결국 사회에서 그들에게 원하는 것은 재능기부 같은 거예요. 재능기부를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저는 후배들에게 그래요. 본인도 먹고 살기 힘들면서 재능기부만 하는 것은 연주에 큰 도움이 되질 않는다고요. 음악으로 돈을 번다는 자체가 너무 힘들기 때문에 중간 중간 큰 고통의 시기도 옵니다. 저는 가능하면 음악은 취미로 하고 다른 일을 찾아보라고 하죠. 물론 돈을 꽤 많이 버는 사람도 있지만, 그 확률이 케이팝 스타가 되는 확률하고 같다고 봐요.
- 학창시절은 어땠나요? 성악을 전공하셨다니 문제아는 아니었을 거라는 선입견에서 여쭤보게 되네요. 솔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고등학교까지는 반항아였던 것 같아요. 요금 말하는 일진 정도는 아니어도 나름 놀았다면 놀았다고 볼 수 있죠.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고3 때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알았다는 것이죠. 고3 이후부터 지금까지는 쉬는 시간 없이 음악과 씨름하고 공부했다고 보시면 될 것 같네요.
- 그럼 성악을 고3때 시작했다는 말씀인가요?
항상 성악을 하면 좋겠다는 주위 분들의 추천은 있었는데 집에서 워낙 반대가 심하니까 할 생각을 못했어요. 그냥 장사든 술집이든 하면서 재미있게 살려고만 생각했었는데 자꾸만 겉돌게 되더라고요. 자꾸 비뚤어지니까 부모님이 결국 허락하셨어요. 그때가 고3이었고, 음악에 몰입하게 됐어요.
- 대학 입학이 쉽지는 않았을 텐데요.
사실 학교는 좀 편안하게 들어갔어요. 음악을 시작하자마자 대전의 한 학교에서 열린 콩쿠르에서 1등을 했어요. 그 덕분에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을 하게 됐어요. 큰 행운이었죠. 그런데 그 당시 사립대학교 측과 학생들의 마찰이 많았어요. 그래서 저는 2학년을 마치고 서울대로 옮겼고, 본격적으로 음악을 하게 되었죠.
- 이태리 유학시절은 어땠나요?
대학교 졸업을 늦게 했어요. 군대 다녀오고 중간에 방황도 좀 하고 그러다가 미국에도 잠깐 갔다 왔는데, 이왕이면 이태리로 가서 공부하자 생각했죠. 어차피 제가 할 일이 이태리 오페라니까요. 그리고 한 8년간 재미있게 놀다왔죠. 사실 유학이 어렵진 않아요. 가려고 마음먹는 것이 어렵지요. 가장 큰 문제는 아무래도 금전적인 부분인데 초기에 큰 금액이 들어가니까 부모님에게 손을 벌렸어요. 나머지는 아르바이트로 충당했고요. 유럽에서 느낀 건 아름답다거나 이런 게 아니라 생김새나 세련된 옷차림 외에 우리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것이었죠. 성격이 우리와 비슷한 점이 많아서 별 어려움 없이 잘 지냈어요. 언어도 기본 구조가 굉장히 어렵게 느껴지지만 쓰는 것과 읽는 것이 똑 같아서 비교적 빨리 배웠고, 일단 음식이 제 입에 너무 잘 맞았어요. 그러는 중에 한국에 IMF가 왔고, 집에서 같은 금액을 보내도 원화 가치가 워낙 많이 하락했기 때문에 최대한 많은 것들을 줄여 생활해야 했어요. 아마도 많은 유학생들이 이때를 가장 힘들었던 시절로 기억할 거예요.
- 그렇다면 유학 생활 잘 하다가 귀국한 계기가 있으시면요?
저는 귀국할 생각이 없이 평생 살아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편찮으셨어요. 그래서 잠시 들어왔던 차에 급하게 결혼하게 되었고 또 학교에 들어가게 되다보니 눌러 앉게 되었죠. 사실 연세 드신 부모님이 가장 큰 원인이었어요. 저는 가족을 위해 희생하며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10을 벌면 9는 가족을 위해서 쓰고 1은 제 자신에게 써야 한다고 생각해요.
- 한때 팟캐스트 ‘나는꼼수다’ 팀에 합류해서 ‘조’가로 청취자들에게 많은 웃음과 감동을 주셨는데 ‘나꼼수’에 참여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쉬운 결정이 아니셨을 텐데요?
저는 철저히 개인주의인데요. 그 당시 국내 상황이 지금 이대로 두면 정말 안 되겠더라고요. 삶의 질에 대해생각을 많이 하던 차에 어느 날 제가 잘 아는 기자에게 연락이 왔어요. 나는 꼼수다에 출연해 줄 수 있겠냐고요. 정봉주 의원이 구속된 상황이었는데 그 사람을 위해서 음악회를 해줄 수 있겠냐 해서 흔쾌히 응했죠. 그렇게 시작한 일이 지난 한 3년간 제 발등을 찍었던 거죠. 하하
- 개인적으로 피해 본 게 있으셨나요?
일단은 학교에서 콜이 좀 없어지고 연주도 당연히 줄어들고, 몸도 좋지 않았고 참 고전했죠. 한마디로 찍혔다 뭐 그런 거죠. 대통령 선거할 때 노래를 부른 적이 있었는데 제 노래가 끝남과 동시에 문재인 후보가 쫙 올라오는 거예요. 그 장면이 모든 방송을 타니까 특히 음악하는 분들이 아 쟤는 저쪽이구나 하고 연락이 안와요. 자연스럽게.
- 지금 심정은 어떠신가요?
잘 모르겠어요. 유럽에 있을 때는 우 편향적이었어요. 굉장히 민족주의적이었는데 우리나라에 들어오니까 이상하게 변질되어 있는 거예요. 마치 좌 하면 공산당 이렇게 몰아가고요.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아요. 공산당하고 북한은 전혀 다른 것이잖아요. 더 큰 문제는 나와 생각이 다르면 종북으로 몰아가는 현상이죠. 제가 마치 북한을 옹호하는 양 공격하고 저는 전혀 그렇지 않은데 말이죠. 그렇게 우리나라가 싫으면 북한으로 가라 이러더군요. 그러면 난 북한도 싫은데 이태리로 갈까? 이렇게 우스갯소리를 해요. 이태리에선 아이들 교육비가 들지 않아요. 그리고 가난해도 고기를 먹을 수 있어요. 중산층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마켓이 따로 있어요. 이뻬르라는 굉장히 큰 시장이 있는 반면 더 싼 이빼르꿉이라는 곳도 있어요. 그보다 더 싼 마켓도 있고요. 포장, 유통, 광고비용을 절감해서 가난한 이들도 부담 없이 고기를 먹을 수 있게 하는 구조예요. 그러다보니 우리나라처럼 가난을 피부로 느끼지는 않죠.
- 현재 김어준 씨가 운영하는 벙커에서 성악을 가르치고 계시지요?
작년 벙커에서 20주 동안 2회에 걸쳐서 성악을 가르쳤고, 올해도 시작했어요. 앞으로 10주간 진행될 예정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참 여유가 없어요. 성악가를 예를 들면 외국에서는 11월에서 6월까지 참 열심히 일을 합니다. 그리고 7월부터 10월까지는 열심히 놀아요. 그때는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다음 시즌을 준비해요. 우리나라 성악가들은 그렇지가 못해요. 열심히 일하고 잠시 쉬어야 하는 시간에도 불안해하는 거예요. 충분하게 놀거나 즐기지를 못하는 겁니다. 성악가들이 머리 기르고 수염 기르는 이유가 그거예요. 언제든 일이 들어오면 바로 투입될 수 있어야 하니까 항상 긴장하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일찍 지치고 힘들어하고 하죠. 예술가로서의 수명이 단축된다는 것을 몰라요. 그런 마음에 여유를 주자가 취지였죠. 김어준 총수가 참 재미있는 사람이에요. 일반적인 사람들 같으면 치밀하게 계획을 세운 후 상의를 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벙커에 공연이 있다고 오라더군요. 공연이 8시인데 6시까지 오라고 해서 갔더니 밥 먹자고 하는거예요. 그러더니 노래 가르치는 강의나 한번 하자고. 그렇게 해서 시작됐는데 생각 외로 참여자 분들의 호응이 좋았습니다.
- 음치 치료에 노하우가 있나요?
10주 교육을 한다고 노래를 잘 하게 되는 경우는 드물어요. 중요한 것은 자신감과 두려움을 떨쳐버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언어를 배울 때도 마찬가지고요.
- 멍청한 질문이지만 성악은 무엇이고, 꿈꾸는 음악이란 어떤 것인가요?
성악, 오페라 등이 다른 장르에 비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대중음악, 국악, 성악 중에 어느 것이 더 우월한가는 판단할 수 없어요. 나름대로 표현의 방법이 다를 뿐이죠. 연주나 목소리로 표현되었을 때 그 진정성이 얼마나 관객에게 전해지느냐가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봐요. 관객들이 진심으로 느낄 때 그 느낌을 제가 받을 때의 행복감은 이루 말할 수 없죠.
제가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왜 음악을 하냐고 물어요. 그럼 ‘저는 음악이 좋아요.’ 이렇게 말하는 아이한텐 그만 두라고 해요. 좋아서 하는 거면 그냥 즐기면 되고요. 음악은 정말 음악 없이는 견딜 수 없는 사람들만이 하는 거라고 말하죠. 30년쯤 음악을 해온 제 입장에서 봤을 때 음악은 어떤 기술이라기보다 그냥 삶의 일부죠.
- 성악을 하고 있거나 준비 중에 있는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음악을 해서 스타가 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내 삶 자체가 최고의 작품이 되도록 살아가는 게 중요해요. 그러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준비하는 작업을 해 나가면 좋겠지요. 그리고 학창 시절에 잘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예술에 대한 이해가 조금 낮다 보니 생기는 문제가 있는데, 신동이 나오면 열광해요. 신동도 나이를 먹으면 잊혀요. 음악가로서 평생 가는 과정 중 하나 일뿐인데 광고의 희생양으로 전락해 버리고 마는 현상이 안타까워요. 어리기 때문에 목소리가 좋고 칭송받을 수 있지만 나이를 먹으면 그 목소리 위에 삶이 느껴지게 변화되거든요. 순간의 삶이 아니라 연속의 삶에 아름다움을 부여해주는 것이 참 중요하다. 이렇게 말하고 싶네요.
- <더 테너>라는 영화가 얼마 전에 개봉됐는데 혹시 보셨나요
배재철이라는 제 친구 이야기인데요. 아주 걸출한 테너죠. 그 친구가 고생을 많이 했어요. 사실은 제가 귀국하려고 마음을 먹게 된 계기 중의 하나이기도 하고요. 그 친구 영향을 받기도 했고, 영화가 참 잘되었으면 좋겠어요.
- 마지막으로 월간 <지주> 독자들에게 한 말씀 해주신다면요?
월간 <지주> 독자 여러분, 일단 부자가 되세요. 그다음에 그 돈을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과 나눠야겠다는 생각을 했으면 좋겠어요. 저는 재능기부를 하지 않습니다만 가는 곳이 있어요. 돈이 없는 교회, 병원, 요양원, 경로당 같은 곳에 갑니다. 제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노래로 그들에게 즐거움을 주려고 노력합니다. 돈을 벌게 되면 조금이라도 나눠 쓰면서 기쁨을 찾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음악 많이 들어주시고, 예술가들에게도 후원해주셔서 좋은 작품 많이 나올 수 있도록 격려해 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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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지주의 딸 아디나를 짝사랑한 네모리노. 바보스러운 그의 사랑의 구애가 성공한 것은 사랑의 묘약 때문이 아니라 그의 진심이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무대를 오가며 굵은 목소리로 관객과 교감하는 바리톤 박경종. 그가 전달하는 감성의 공명은 기계적인 목소리가 아닌 우직한 삶에서 뿜어져 나오는 소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방황의 십대를 보내고, 외로운 타국 생활을 거치며 나이 마흔에 첫아이를 안은 그의 삶의 질곡이 고스란히 목소리에 스며들어 관객에게 전달될 때 그의 진심도 함께 전이 되었으리라.
사뭇 진지한 오페라 리허설을 지켜보던 기자의 눈에는 그의 삶이 낡은 영화의 필름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그가 말한 것처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작은 권력에 두려워하지 말고 진심 어린 소리를 낼 때 세상은 조금 더 아름답게 변화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갑자기 생각난 김어준의 명언 “쫄지마. 씨바!”
본 글은 '월간地酒' 2015년 4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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